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페루 축구 국가대표팀 (문단 편집) === [[1936 베를린 올림픽|1936년 베를린 올림픽]] 준준결승전[*8강] 논란 === [[1935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페루|1935년 남미 축구 선수권 대회]]는, 다음해에 열릴 [[1936 베를린 올림픽|1936년 베를린 올림픽]] 축구 경기 진출을 위한 예선을 겸했다. 하지만 정작 이 대회에서 우승한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의 불참으로 대신 페루가 진출하였다. 문제가 된 경기는 8월 8일에 열린 [[오스트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오스트리아]]와의 경기였는데, 오스트리아는 3-1로 [[이집트 축구 국가대표팀|이집트]]를, 페루는 [[테오도로 페르난데스]]의 5골에 힘입어 [[핀란드 축구 국가대표팀|핀란드]]를 ''' 7-3 '''으로 이기고 8강에서 둘이 만나게 되었다. 발터 베르긴츠가 23분에 첫 골을, 클레멘트 슈타인메츠가 37분에 2번째 골을 넣으며 앞서가며 전반전을 끝냈다. 0 대 2로 뒤진 페루 국민들은 올림픽 본선 진출권을 연장하겠다는 각오를 다지며 후반전에 접어들었다. 후반 30분 [[호르헤 알칼데]]가 추격골을, 6분 뒤에는 [[알레한드로 비야누에바]]가 동점골을 넣었다. 경기의 남은 정규 시간에는 더 이상의 득점이 나오지 않았고, 경기는 연장전으로 들어갔다. 연장전에서는 경쟁이 치열했고, 페루 선수들이 2골 뒤진 상황에서 동점골을 넣으면서 경기는 연장전으로 접어들었다. 페루는 연장전에서 5골을 넣었지만 주심이 3골을 넣지 못했다고 선언해 최종 점수인 4-2로 승리했다. 오스트리아인들은 페루 팬들이 경기장에 난입해 축구 경기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이유로 재시합을 요구했다. 오스트리아는 또 페루 선수들이 오스트리아 선수들을 밀쳤고 한 명이 권총을 들고 있던 관중들이 "경기장에 몰려들었다"고 주장했다. 페루는 이 문제로 소환되었으나 독일군의 행렬식으로 인해 연기되었다. 페루의 주장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고, 올림픽 위원회와 FIFA는 오스트리아인들의 편을 들었고, 폐쇄적인 경기장에서의 재시합은 8월 10일에 예정되어 있었고, 이후 1936년 8월 11일에 다시 예정되어 있었다. 페루선수들은 모욕적이고 차별적이라고 판단하여 이러한 행동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페루와 콜롬비아의 올림픽 대표단 전원은 독일을 떠났다. 아르헨티나, 칠레, 우루과이, 멕시코가 페루와의 연대를 표명했다. 페루 올림픽 위원회 위원인 미겔 다소는 "우리는 유럽 육상에 대한 믿음이 없다. 우리가 이곳에 와서 장사꾼들을 많이 찾아냈다." 그 경기는 오스트리아에 부전승했다. 페루 팀과 대표단이 칼라오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진정한 챔피언이라고 환호하는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페루에서는 분노한 군중들이 올림픽 깃발을 찢고 독일 영사관에 돌을 던지고 칼라오 부두에 독일 선박을 싣는 것을 거부하고 오스카 베나비데스 라레아 대통령이 '교활한 베를린의 결정'이라고 하며 선동적인 연설을 하는 등 올림픽위원회 결정에 항의했다. 당시는 이것이 주장되지 않았지만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 당국이 이 상황에 어느 정도 개입했을 것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오스트리아는 이 올림픽 축구 경기에서 이탈리아와 결승에서 경기해 2-1로 싸워 은메달을 받았고, 페루는 1939년 남미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